금속을 비운 60년의 조각

단단한 금속에서 비움의 의미를 길어 올린 60여 년의 조각 세계가 대전 유성구에서 펼쳐진다. KAIST 미술관 정문술홀에서 열리는 엄태정 작가 개인전 탈(脫)창조의 세계로는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작가가 오랜 시간 이어온 작품 활동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과학기술 연구와 교육의 중심 공간에 자리한 미술관에서 인간의 내면과 창조의 의미를 다룬 조각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관람객은 금속의 물성과 다양한 조형을 따라가며 무엇을 만들 것인지뿐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고 비울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과학기술 공간에서 만나는 예술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291 한국과학기술원 안에 있는 KAIST 미술관은 2024년 12월 문을 열었다. 지상 3층 규모로 조성된 이곳은 여러 미술 작품과 기획 전시를 소개하며 KAIST 구성원과 지역 주민이 예술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술관 야외 공간에 들어서면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엄태정 작가의 낯선 자의 출현 I·II·III이 먼저 시선을 끈다. KAIST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설치된 작품으로,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금속 조각의 선과 면, 공간의 관계를 살펴보게 한다.
야외 작품에서 시작된 흐름은 미술관 1층 정문술홀로 이어진다. 전시장에서는 엄태정 작가가 60여 년 동안 구축한 조각 세계와 금속을 대하는 태도를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다.
탈창조가 던지는 질문
전시 제목인 탈창조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성취하려는 욕망, 작품의 주인이 되려는 자아를 내려놓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자신을 비워 새로운 창조에 다가가는 과정을 작품으로 풀어낸다는 의미다.
엄태정 작가는 오랫동안 금속을 주요 재료로 삼아 작품을 제작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창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비워낼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조각을 통해 제시한다. 채우는 행위만이 아니라 여백을 남기고 비우는 과정 역시 창조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전시 전체를 관통한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에서는 금속 특유의 단단함과 차가움이 먼저 드러난다. 그러나 작품을 차례로 살펴보면 감상은 재료의 성질이나 외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금속으로 이뤄진 형태와 그 사이에 남겨진 빈 공간이 함께 시야에 들어오면서, 조각을 이루는 부분과 비워진 부분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금속과 여백으로 이어진 전시장
정문술홀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금속 조각이 배치돼 있다. 작품마다 금속의 면과 선, 덩어리와 여백이 다르게 나타나며 관람객의 시선도 작품의 바깥과 안쪽을 오간다. 전시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여러 작품이 이어지면서 작가가 오랜 세월 탐구해 온 조형 언어를 폭넓게 살펴볼 수 있다.
빠르게 새로운 기술과 답을 찾아가는 과학의 공간에서, 정해진 답보다 오래 남는 질문을 건네는 예술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과학기술과 예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며, KAIST 미술관은 두 영역을 한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연결한다.
현장에서는 금속 조각의 묵직한 존재감과 작품 사이의 여백이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 관람객들은 작품의 앞과 옆을 천천히 이동하며 형태의 변화를 살피고, 비워진 공간까지 조각의 일부로 바라보게 된다. 화려한 설명보다 작품의 구조와 재료가 먼저 말을 거는 구성이다.
60여 년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이번 개인전은 한국 추상조각 1세대인 엄태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60여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명한다. 금속이라는 재료를 지속해서 다뤄온 작가가 창조와 자아, 비움의 관계를 어떻게 작품에 담아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야외에 설치된 낯선 자의 출현 I·II·III과 정문술홀의 전시 작품을 함께 살펴보면 미술관 안팎에서 이어지는 조각 경험도 가능하다. 알루미늄 작품이 주변 공간과 맺는 관계를 본 뒤 실내 작품으로 이동하면, 금속이 지닌 물성과 조형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완성된 형태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를 위해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를 묻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따라가며 성취와 소유의 관점에서 벗어나 비움과 여백이 지닌 의미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다.
전시 관람 정보
| 전시명 | 엄태정 개인전 탈(脫)창조의 세계로 |
|---|---|
| 전시 장소 | KAIST 미술관 E9-1 정문술홀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291 한국과학기술원 |
| 전시 기간 | 2026년 8월 26일부터 2027년 6월 30일까지 |
| 관람 시간 |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
| 문의 | KAIST 미술관 042-350-1843 |
KAIST 미술관에서는 엄태정 개인전과 함께 류경채 마음의 시, 파리와 로댕 그리고 예술의 순간들, 페치 워크숍, 느슨한 시간 등 여러 전시도 소개하고 있다. 엄태정 작가의 조각을 중심으로 미술관의 다른 전시까지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현장 안에서 금속 조각과 여백의 의미를 마주하는 이번 전시는 KAIST 미술관이 지역 주민과 구성원에게 제공하는 문화예술 경험을 보여준다. 60여 년에 걸쳐 이어진 작가의 탐구와 탈창조라는 질문은 단단한 금속 작품을 통해 관람객 앞에 놓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