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으로 번진 아리랑 신호

풍경이 감정으로 남는 순간
가을이 깊어지면서 아침저녁 공기는 한층 쌀쌀해지고 나무와 들판의 빛깔도 서서히 달라진다.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지만, 그때 마음에 스며든 감정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한다.
대전 갤러리 메르헨에서 열리는 한수희 작가의 개인전 《Arirang Signal》 점의 여정은 풍경을 본 뒤 마음에 남은 시간과 감정의 흔적을 점으로 풀어낸 전시다. 화면을 채운 색과 형태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점이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지고, 그 너머에 자리한 기억과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27년 동안 이어진 점의 작업
한수희 작가는 약 27년 동안 점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어린 시절 우연히 점을 접한 뒤 대학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점을 찍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같은 표현 방식을 유지했지만, 점 자체를 작품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점은 자연에서 받은 감각과 마음속에 쌓인 시간을 화면으로 옮기는 표현 방식에 가깝다.
작가는 풍경을 본 뒤 무엇이 기억에 남는지를 10년 넘게 고민해 왔다. 아름다운 장소의 구체적인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질 수 있지만, 그곳에서 느낀 감동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함은 더 오래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풍경이 마음속에 남긴 감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
한수희 작가에게 자연은 단순히 화면에 옮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산과 들을 바라보고 빛과 바람을 느끼며 한 장소에 머문 경험은 작업실에서 수많은 점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연에서 마주한 순간을 예술가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그때 감지한 정서와 기억을 회화로 전하는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는 일만큼 상대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는 일도 중요하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연이 건네는 빛과 색, 바람과 비의 감각을 포착하는 태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연에서 시작된 감정은 점을 반복해서 찍는 과정을 지나며 새로운 화면으로 바뀐다.
점 위에 시간이 쌓이는 과정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에서 받은 감정에 충분히 머무는 일이다. 화면에 점을 적게 찍어야 할 때에도 점을 더하게 되는 이유는 작업하는 동안 그 감정과 쉽게 헤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점의 밀도와 색감이 다른 점도 이 같은 작업 태도와 연결된다.
처음 놓인 점 위에 또 다른 점이 더해지고, 밝은색과 어두운색이 거듭 쌓이면 화면은 처음과 다른 깊이를 갖는다. 작가는 이를 콩이 된장으로 변하는 과정에 비유했다. 같은 재료에서 출발해도 시간이 더해지면서 전혀 다른 깊이와 맛이 생기듯, 자연에서 받은 최초의 감정도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 새로운 색과 결을 얻는다.
점 하나는 작지만, 수많은 점이 축적되면 풍경과 시간, 기억을 함께 품은 화면이 된다. 관람자는 작품 가까이에서 개별적인 점과 색의 층을 살필 수 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는 점들이 이루는 전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옥천의 비가 작품이 되기까지
작가의 기억 가운데에는 옥천에서 만난 비가 있다. 여행 중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을 만났고, 당시에는 걷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졌다. 작가는 옛집 처마 아래에 머물며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경험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가 내리는 장면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처마 아래에서 비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과 그 순간에 머문 시간이 더욱 깊게 남았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온 작가는 그 비를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다. 자연을 마주한 경험이 기억에 남고, 기억 속 감정이 다시 점과 색으로 표현되는 과정은 이번 전시가 말하는 ‘신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리랑 회화가 담은 삶의 리듬
전시 제목인 《Arirang Signal》은 한수희 작가가 탐구해 온 ‘아리랑 회화’와 맞닿아 있다. 전시 홍보자료에서 설명하는 아리랑은 민요나 전통의 상징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실과 회복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인간 삶의 리듬을 뜻한다.
‘아리랑 시그널’은 작가가 지나온 시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는 방식으로 확장된 개념이다. 수많은 점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그 풍경은 다시 작품 앞에 선 관람자의 기억을 불러낸다. 관람자는 작가가 경험한 자연을 바라보는 동시에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 남은 감정을 되짚게 된다.
전시장에서는 반복된 점과 겹쳐진 색이 가까운 거리에서 촘촘한 흔적으로 드러난다. 시선이 화면 전체로 넓어지면 각각의 점은 풍경의 흐름 속으로 이어진다. 가을빛과 자연의 기억을 품은 작품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관람자와 마주한다.
대전 전시 일정과 장소
| 전시명 | 한수희 개인전 《Arirang Signal》 점의 여정 |
|---|---|
| 전시 기간 | 2026년 10월 21일 수요일부터 10월 27일 화요일까지 |
| 관람 시간 |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
| 전시 장소 | 대전 갤러리 메르헨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대로556번길 87, 도룡동 대덕초등학교 앞 |
| 주차 | 갤러리 메르헨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가능 |
| 공영주차장 위치 |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395-10 |
이번 전시는 풍경을 구성하는 작은 점과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자연에서 시작된 감정이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 회화로 완성되고, 완성된 작품이 다시 관람자의 기억을 건드리는 흐름을 보여준다. 한수희 작가가 오랜 시간 이어온 점의 여정은 자연과 사람의 마음 사이를 오가는 하나의 신호로 제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