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화가, 대전에서 다시

반세기 만에 고향에서 만난 네 화가
대전시립미술관의 지역미술조명사업 세 번째 전시인 《선과 색, 지역의 기억》이 2026년 10월 21일 개막했다. 대전고등학교 미술부에서 함께 그림을 배웠던 이종상, 이철주, 유희영, 하동철을 한자리에서 조명하는 전시다.
고등학생 시절 같은 공간에서 미술가의 꿈을 키운 네 사람은 이후 한국화와 서양화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반세기가 흐른 뒤 한국 현대미술의 원로가 된 이들은 고향 대전의 미술관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 전시는 공통된 출발점과 각기 다른 작품 세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전시의 중심에는 회화의 기본 언어인 선과 색이 놓여 있다. 한국화를 택한 이종상과 이철주는 선을 각자의 방식으로 확장했고, 서양화를 선택한 유희영과 하동철은 색과 빛을 고유한 조형 언어로 발전시켰다. 미술관은 네 작가를 하나의 지역 화풍으로 단순하게 묶기보다, 같은 지역에서 출발한 이들이 어떻게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는지 보여준다.
대전 미술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장기 사업
지역미술조명사업은 대전시립미술관이 2024년부터 추진해 온 장기 프로젝트다.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교육과 연구를 연계해 대전 미술의 역사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사업이다.
사업 첫해에는 미술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대전 미술이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는 연계 교육이 진행됐다. 두 번째 전시인 《비상 飛上;》에서는 박승무, 조평휘, 민경갑, 최종태 등 네 원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명했다.
사업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원로 예술인 특화 전시관 조성도 구체적인 공간으로 이어졌다. 2026년 4월 대전창작센터에는 대전 출신 조각가 최종태의 이름을 딴 최종태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작가와 작품을 전시로 알리고 관련 자료를 연구하며, 그 성과를 작가의 이름을 내건 전시 공간으로 연결한 것이다.
지역미술조명사업은 대전에서 활동했거나 대전과 인연을 맺은 예술가를 체계적으로 살피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분명하다. 이번 세 번째 전시는 네 원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지역 미술사의 한 흐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대전에서 시작된 화가의 길
이종상, 이철주, 유희영, 하동철은 대전고등학교 미술부에서 함께 그림을 배웠다. 당시 대전에는 미술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이 마땅하지 않아 네 사람은 고등학교 미술부에서 실력을 다지며 서울 소재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대전에서 미술의 기초를 익힌 네 학생은 훗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화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작품의 표현 방식은 서로 뚜렷하게 달라졌다. 두 사람은 한국화를, 다른 두 사람은 서양화를 선택했고 선과 색을 탐구하는 방향도 각기 다르게 전개됐다.
전시는 대전시립미술관 본관 1전시실부터 4전시실까지 이어진다. 넓은 전시 공간을 따라가면 네 작가의 작품이 변화한 과정과 서로 다른 조형 언어가 차례로 드러난다. 관람객들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된 네 갈래의 예술적 여정을 비교하며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화의 선을 넓힌 이종상
이종상은 인물을 표현하던 선을 국토와 역사를 담는 먹선으로 확장한 작가다. 1977년부터 독도를 직접 찾아가 그렸으며, 이후에는 형상이 나타나기 이전의 질서를 탐구하는 원형상 연작으로 작품 세계를 넓혔다.
원형상 연작은 199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의 카루젤 전시장에도 전시됐다. 그의 작품에서는 굵고 힘 있는 먹선이 화면의 구조를 이루며, 한국화의 선이 지닌 힘과 규모를 드러낸다.
이종상의 선은 대상을 단단하게 붙잡는 역할을 한다. 인물에서 국토와 역사로, 다시 근원적 질서에 관한 탐구로 이어진 변화는 선이 단순한 외곽 표현을 넘어 작가의 문제의식을 담는 핵심 수단으로 발전한 과정을 보여준다.
획을 독립된 세계로 만든 이철주
이철주는 인물을 감싸던 필선을 도시 풍경으로 확장한 뒤, 글자의 뜻에서 벗어난 획 자체의 세계로 나아갔다. 작품 속 선은 특정 대상을 설명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 요소로 자리 잡는다.
같은 한국화 영역에서 활동한 이종상과 이철주는 선을 다루는 방식에서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종상이 선으로 대상과 주제를 붙잡는다면, 이철주는 선을 대상에서 풀어내며 획 자체의 움직임과 구조에 집중한다.
두 작가의 작품을 함께 살펴보면 한국화의 선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선은 국토와 역사를 표현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의미에서 벗어나 화면을 구성하는 자율적인 언어가 되기도 한다.
전통의 색을 쌓아 올린 유희영
유희영은 격정적인 붓질을 점차 덜어내고 맑고 순수한 색면을 쌓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켰다. 화면을 여러 차례 덧칠해 빈틈없는 표면을 완성하는 작업 방식이 특징이다.
그의 색은 옛 건축물의 단청에서 비롯됐다. 단정하게 구성된 색면에는 한국 전통의 색감이 반영돼 있으며, 반복해 쌓인 색은 화면에 밀도와 깊이를 더한다.
유희영의 작품에서는 거친 움직임을 줄여 가는 과정과 색 자체에 집중하는 변화가 확인된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낸 화면은 색의 관계와 구조가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한다.
빛의 기억을 그린 하동철
하동철은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가며 마주한 빛의 기억을 평생의 작품 주제로 삼았다. 그의 화면에서 빛은 처음에는 넓은 색의 띠로 나타났고, 이후 점차 가느다란 선으로 변했다. 다시 수없이 반복되는 선으로 번지며 독특한 화면을 형성했다.
짧은 선들은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한다. 반복되는 선과 색의 구조는 화면 위에서 빛이 퍼지고 쏟아지는 듯한 시각적 인상을 만든다. 개인의 기억에서 시작된 빛은 오랜 작업을 거치며 하동철을 대표하는 조형 언어로 자리 잡았다.
유희영이 정제된 색면을 쌓아 색의 밀도를 보여준다면, 하동철은 색과 선을 반복하며 빛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두 서양화가의 작품은 색이 서로 다른 기억과 형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선과 색으로 읽는 지역의 기억
이번 전시는 네 작가의 학창 시절 인연만을 다루지 않는다. 같은 도시와 학교에서 출발한 예술가들이 각자의 선택과 탐구를 거쳐 어떻게 서로 다른 작품 세계를 완성했는지를 선과 색이라는 기준으로 풀어낸다.
한국화와 서양화, 대상과 획, 색면과 빛이라는 차이는 네 작가의 개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대전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공통의 기억은 전시 전체를 잇는 배경이 된다.
대전에서 첫걸음을 뗀 예술가를 고향의 미술관이 다시 연구하고 기록한다는 점이 전시의 핵심이다. 지역 예술가를 발굴하고 조명해 온 사업의 흐름과 네 원로 작가의 작품 세계가 한 공간에서 맞닿는다.
전시 장소와 기간
| 전시명 | 지역미술조명사업Ⅲ 《선과 색, 지역의 기억》 |
|---|---|
| 참여 작가 | 이종상, 이철주, 유희영, 하동철 |
| 전시 기간 | 2026년 10월 21일부터 2027년 1월 31일까지 |
| 전시 장소 | 대전시립미술관 본관 1전시실부터 4전시실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5 둔산대공원 |
전시실에서는 힘 있는 먹선, 의미에서 자유로워진 획, 여러 번 덧칠한 색면,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빛의 선이 저마다 다른 리듬을 만든다. 관람객들은 네 작가의 작품을 따라 이동하며 대전에서 시작된 한국 현대미술의 여러 방향을 차분히 마주하게 된다.
